이미테이션가방 [이범의 불편한 진실] ‘문명의 보루’로서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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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극우 대세론’은 자칫 유럽과 미국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게 만든다. 유럽의 극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래도 ‘이들은 나와 동일한 문명’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 미국의 극우는 사뭇 다르다. 특히 ‘과학’에 대한 태도에서 양자 간에 극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얼마 전 피살된 미국의 우파 정치인 찰리 커크를 보자. 그에 따르면 기후변화는 별것 아닐 뿐 아니라 과학자 사회에서 합의된 내용이 아니며, 생물이 진화했음을 입증할 증거는 전혀 없고, 코로나 백신을 서둘러 접종하도록 만든 요인은 바로 제약회사의 이윤 동기다. 커크의 주장은 그의 정치적 동지인 트럼프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트럼프는 백신 음모론자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했고, 유엔 연설에서 “기후변화는 여태까지 전 세계에 퍼진 가장 황당한 사기”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커크는 트럼프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트럼프는 진화론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적이 없는 데 비해 커크는 이를 명확하게 부정했다. 트럼프가 동성애자를 제쳐놓고 트랜스젠더를 공격하고 있는 반면 그는 동성애자를 포함한 성소수자(LGBTQ) 전체를 배격했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에서 동성결혼 반대를 표방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대통령이 된 뒤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활용하진 않았으며, 올해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등 여러 게이 관료들을 기용하기도 했다.)
커크의 사상적 배경은 무엇인가? 그는 미션스쿨을 다녔고, 흔히 ‘복음주의’로 불리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학창 시절 이미 자신의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자답게 성서를 ‘문자 그대로’ 진리로서 받아들였는데, 이는 자연히 과학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학문적 엘리트에 대한 반감을 수반했을 것이다.
이것이 유럽 극우와 미국 극우의 결정적인 차이다. 유럽인들은 국가가 부여하는 종교적 질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지난한 투쟁 과정을 거쳤다. 반면 미국인들은 일찌감치 종교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 여러 영역이 종교로부터 미분리된 채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1963년 퓰리처상 수상작)는 이런 환경에서 미국의 복음주의 개신교가 어떻게 반지성주의의 모태로 작용했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미·유럽 극우, 과학서 문명적 차이
현재 미국은 선진국들 가운데 진화론을 믿는 비율이 최하위권에 속한다. 생물학뿐만 아니라 지질학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데, 미국 인구의 3분의 1이 성서에 근거해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처럼) 지구가 6000~1만년 전에 창조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미국의 복음주의적 반과학 정서에 비견할 만한 것은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믿음 정도일 것이다. 그래봤자 서유럽 지역에서 홀로코스트를 완전히 부정하는 비율은 겨우 2%이고 ‘크게 과장되었다’고 믿는 비율도 6%에 불과하다(2024년 Anti-Defamation League 조사).
이렇게 보면 유럽 극우와 미국 극우의 ‘문명적’ 차이를 알 수 있다. 양쪽 모두 경제적 불안층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민자를 적대시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미국의 극우는 유독 인류가 현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지식이 과학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학적 업적이나 과학적 방법에 대해 무지한 것을 창피해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근거’에 기반해 토론하고 설득하기가 매우 어렵다. 개신교 근본주의는 종교와 과학을 상충시키고 과학에 대한 종교의 우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이슬람 근본주의와 유사한 점이 있다.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지난주 발표한 ‘트럼프는 어떻게 중국을 위대하게 만들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트럼프 측 인사들은 과학 연구에 대한 자금 지원을 꺼리는 것뿐만 아니라, 연구의 상당 부분에 대한 결론까지도 통제하려 한다는 점이 명백하다. 과학자들은 기후변화가 실제가 아니며 백신이 효과가 없다는 등의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4월 ‘과학자들이 진화 논문을 발표하면 추방당할까 두려워서 발표를 철회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기도 했다.
이 같은 미국 과학의 상황은 공산화 초기의 소련을 떠올리게 한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1917년은 양자역학이 싹튼 시기였다. 그런데 소련 공산당은 1920년대 성립되던 양자 현상에 대한 확률론적 이해(코펜하겐 해석)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확률의 물밑에 존재하는 결정론적 질서를 탐구하라는 연구지침을 하달했다. 역사의 ‘필연적’ 진보를 믿는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을 과학 연구에 투영한 것이다.
그나마 물리학은 양반이었다. 소련의 생물학이 겪은 사건은 ‘재난’ 수준이었다. 농학자 리센코가 제기한 용불용설(획득형질 유전설)이 소련의 공식 생물학 이론으로 채택된 것이다. 다윈의 진화이론, 멘델의 유전법칙에 근거한 연구는 외면받았다. 이로 인해 소련의 유전학은 서구에 크게 뒤처졌고, 이 격차는 20세기 내내 극복되지 못했다.
‘주인과 노예’ 변증법 눈앞에 펼쳐져
소련에서 벌어졌던 이러한 사태가 지금 트럼프 정부에서 재연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연방정부 에너지부에서 ‘기후변화’나 ‘탈탄소’와 같은 용어를 쓰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은 상징적 사건이다. 하버드대를 위시한 대학들이 공격받고, 기초과학 연구·개발비가 삭감되고, 우수한 과학자들을 끌어들이는 수단이었던 H-1B 비자 수수료가 100배 인상되었다.
서구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과학을 비판해왔다. 과학은 객관적이지도 가치중립적이지도 않다는 지적,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본성과 자연을 소외시키고 환경위기를 일으킨다는 주장, 1990년대 이래 과학사·과학철학 연구에까지 도입된 사회구성주의의 영향 등은 과학 혹은 계몽의 기획 전체를 선뜻 신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옛 소련에 비견할 만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지금, 과학에 대해 따지기만 해온 인문학자들에게 뭘 기대할 수 있을까? 아마도 과학자가 스스로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결정적 순간에 힘을 모은 전력이 있다. 1987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창조론(창조과학)을 진화론과 동등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루이지애나주의 법이 위헌인지를 따지고 있었다.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뜻을 모아 결국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2011년에는 한국의 창조과학 단체가 교과서에서 시조새를 빼달라는 청원을 이명박 정부의 교육과학부에 제기했고 이들의 시도는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러자 과학기술한림원과 생물학 관련 8개 학회가 나서서 이를 가로막았다.
한국은 개신교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은 나라다. 개화기 수입된 개신교는 서구 문물과 평등사상을 전파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개신교인은 33인 중 16명으로 거의 절반에 달했는데, 당시 기독교 인구 비율이 1%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기여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이 망한 지 9년 만에 왕정복고가 아닌 공화국(임시정부) 수립에 나서게 된 데에는 천도교(33인 중 15명)와 더불어 개신교의 영향이 컸다.
100년이 지난 지금, 이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 개신교는 리박스쿨, 트루스포럼 등 ‘절대로 설득당하지 않는’ 극우 세력의 숙주가 되었다. 이들에 대한 대응이 ‘혐오하니 극우’라든가 ‘어디는 쓰레기’라는 식의 게으르고 피상적인 수준이어서는 곤란하다. 우리 앞에 놓인 경계는 ‘당파’가 아니라 ‘문명’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핵심은 과학을 포함한 학술 논쟁을 복기하고 재구성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근거를 갖춘 비판’을 익히는 데 이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튜브 채널 <보다>나 <안될과학>은 ‘우리 문명 최고의 예능’이 아닐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21일 제80주년 경찰의날 기념사에서 “경찰이 권력의 편에 설 때마다 이 땅의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는 유린당하고 국민주권은 짓밟혔다”며 “경찰이 헌법과 국민을 수호하는 민주경찰로 온전히 자리잡을 수 있도록 경찰의 중립성을 확보하고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도 “경찰에 수사 기능을 몰아주는 것이 맞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수사·기소 분리로 권한이 커지는 경찰 또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일관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대통령 말이 아니더라도 경찰개혁의 당위성은 차고 넘친다. 민주화 이후 권한이 커진 검찰이 윤석열 집권기에 스스로 권력이 되어버리는 동안 경찰은 권력의 도구 역할에 충실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윤석열 정권의 ‘건폭몰이’에 맞춰 중요 민생 문제인 전세사기 수사보다도 많은 포상을 내걸고 건설노조원들을 대대적으로 수사한 게 비근한 예이고, 경찰 서열 1·2위인 경찰청장·서울청장이 12·3 내란에 가담한 건 그 정점이라 할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경찰이 ‘민중의 몽둥이’ 노릇을 한 건 주지의 사실이다. 정부수립 초기 ‘검찰파쇼’ 우려가 제기됐음에도 기소권을 가진 검찰에 수사권까지 부여한 건 해방정국에서 보인 경찰의 무소불위 행태를 견제·통제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검찰청 폐지와 수사·기소 분리가 골자인 개정 정부조직법이 내년 10월 시행되면 일부 중대범죄와 고위공직자 범죄를 제외한 범죄 수사가 오롯이 경찰 몫이 된다. 권한이 커지는 경찰의 정치적 중립과 민주적 통제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경찰의 수사 역량 확대도 시급한 과제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에 1차 수사종결권을 부여한 이후 경찰의 사건처리 지연과 수사역량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개정 정부조직법이 시행되면 또 한번 본격 시험대에 선다. 경찰 사건 다수는 민생범죄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공권력밖에는 믿을 게 없는 힘없는 서민이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게 된다.
형사사법시스템 선진화를 위한 검찰개혁과 경찰개혁은 동전의 양면이고, 경찰개혁이 성공해야 검찰개혁도 성공한다. 그럼에도 경찰개혁에 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정부·여당은 민주·민생·수사역량이 핵심인 경찰개혁 논의를 본격화하고, 검찰개혁 후속입법에도 반영해야 한다.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부산에서.”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회자된 이 말은 고속도로가 사람과 물류를 실어나르는 시대적 상징이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인공지능(AI) 시대의 고속도로는 데이터가 흐르는 인프라다. 이 고속도로는 서로 다른 얼굴의 데이터센터와 데이터 스페이스로 이뤄진 쌍둥이 인프라다. 물리적 기반인 데이터센터, 조직 간 신뢰를 기반으로 데이터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데이터 스페이스다.
글로벌 통상 환경이 급변하는 지금 데이터 스페이스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세계 최초의 상용화 데이터 스페이스로 2023년 유럽에서 자동차산업용 카테나X 데이터 스페이스가 나타나면서 화학·반도체 등 다양한 산업 분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이 변화는 산업 공급망의 작동 방식을 바꾸고 있으며, 국제 통상 환경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수출 중심의 한국엔 결정적 흐름이다.
데이터 스페이스는 기업들이 신뢰를 기반으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디지털 교류 공간’이다. 여기서는 기업이 자사의 존재를 알리고, 고객사의 데이터 요청에 실시간으로 응답할 수 있다. 이 공간에 참여하면 단순히 제품 수출을 넘어 데이터 기반 서비스·소프트웨어까지 수출할 수 있다.
한국은 데이터 스페이스 관련 준비가 뒤처져 있다. 왜 그럴까?
첫째, 기업이 적극 나서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대기업이 앞장서 상용화 데이터 스페이스 추진을 주도하고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AI 시대에 ‘AI 고속도로’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정부가 적극 나서지 않았다. 정부는 이제 시작 단계다. 데이터 스페이스에 대한 내년 예산이 편성돼 있으나 규모가 작아 주요 산업별 데이터 스페이스를 본격 추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에는 관련 전략이 아직 없다.
셋째, 기업과 정부를 도와줄 전문가가 부족하다. 데이터 스페이스의 전략적 활용을 주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와 대기업이 빠르게 움직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점도 있다.
이제 필요한 일은, 전략 수립과 실증 사업의 대대적 확대와 이를 바탕으로 한 글로벌 시장 선점에 나서는 것이다. 데이터 스페이스 전략 추진과 더불어 ‘데이터 스페이스를 활용한 공급망’ 연결 제품·공정·서비스 적용 실증과 스케일업(시장 확장) 실증이 가능하도록 기업들은 투자를, 정부는 예산을 확대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가 양성되며 확장 기반이 마련된다. 정부와 기업은 예산과 투자에서 실증 사업에 우선순위를 두는 결단이 필요하다.
AI 시대의 고속도로는 수출 중심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국제 통상 인프라다. 정부와 기업은 작든 크든 실증을 속도감 있게 착수하고 확산해야 한다. 지금 합류하지 못하면 고립되지만, 지금부터라도 뛰기 시작하면 앞서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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